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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y

영화 타이타닉 인물들 에드워드 존 스미스타이타닉호의 선장침몰하기 전 어떻게든 침몰을 막아보려고해수의 배수를 시도하거나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파사들에게 통신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끝내 막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최후를 맞이하기전까지 승객들의 대피를 도왔다고 한다.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타이타닉호의 1등항해사보트를 타는 것을 거부하고 배에 남아 끝까지 승객들을 구조하고 자신은 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얼어 죽고 만다.그가 졸업한 학교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가 세워졌고 고향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문제는 영화에서의 그는 우왕좌왕 하는 승객들을 제지하기 위해 총을 발사하다 잭과 파브리지오의 친구인 토미를 죽이게 되어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걸로 나온다.이것 때문에 영화사는 그의 유족들과 그가 졸업했던 학교.. 더보기
울릉도 왕국 우산국 중학생때 가족여행으로 서해 외연도로 여행을 갔었다. 처음으로 배를 타봤고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난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울릉도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울릉도 역시 신라시대의 또 다른 국가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때부터 한반도 역사와 함께 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가 한창 싸울때 우산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왕국 이었다. 신라가 호시탐탐 우산국을 노리고 있었으나 험한 뱃길과 높은 절벽으로 둘러쌓여 정복이 쉽지 않은 섬이었다. 신라가 세력을 확장할때 우산국 정벌을 위하여 몇 차례 원정을 갔지만 실패했다는 예상이 된다. 고구려 영토 깊숙히 전진하려던 신라는 우산국이 신경 쓰게 된다. 신라 원정군이 몇 차례 .. 더보기
New Korea Plan 한국이 잘못됬으면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가 될수도 있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이 38선을 넘어 선전포고 없이 남한을 침략했다. 당시 시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38선 부근에서 자잘했던 총격전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으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장군도 조그만 국지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북한의 기습남침이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피난 1호 인물이었다. 입법부 사법부도 이승만이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시 정부에서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었으나 이승만은 대전까지 내려가 버렸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 사흘만에 서울을 빼았겼고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으로 정하고 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이 고전하자 미국정부에서는.. 더보기
승리하고도 처형당한 장군 일본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여 조선군은 한강방어를 하던 중 그 마저도 무너져버렸다.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장군은 도성방어와 한강을 포기하고 임진강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왜군과 맞서기 위해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 이혼장군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게 되어 함께 도성안에 있는 왜군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양주를 중심에 두고 왜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해유령부근에 잠복하고 있었다. 잠복 하던 중 왜군 1개부대가 해유령을 넘어오자 미리 매복중이던 신각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적을 포위하여 왜군 1개부대를 몰살 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도망치던 선조에게 전달.. 더보기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그리고 태국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명나라의 참전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는 도중 여진족 누르하치가 임진왜란에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어버이의 나라 조선을 침략한 괘씸한 왜적을 응징하겠다" 라며 명나라를 통해 조선은 소식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입장에서는 반길 입장이 아니었다. 일단 여진족의 참전은 명나라와 거리를 둔다는 이야기가 될수도 있으며 조선은 누르하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조선은 여진족을 오랑캐 취급하였고 여진족이 참전하여 왜군을 몰아낸다 한들 그대로 돌아갈지도 미지수였다. 오히려 명나라와 같은 대우를 요구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여진족의 참전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윤두수는 "여진족이 참.. 더보기
김완의 일본 탈출기 김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1589년에 선전관에 벼슬에 오르고 2년 뒤 사도첨사가 되었고 선조 25년 임진(1592) 4월 13일 왜적이 부산항에 상륙하였음을 듣고 전라 좌수사 이 순신 장군진에 종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휴전에 접어들때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여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킨다. 자신은 도성을 버리고 명나라 코 앞 신의주까지 도망가고 이순신은 왜군들과 싸우고 바다를 지켰으니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는 것을 두려워한 선조는 이순신을 붙잡아들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당하면서 이순신 휘하에 장수들은 사직을 하거나 근무지를 옮긴다. 하지만 김완장군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때 함께 한다. 이순신과 함께 했을때는 옥포에서 적선 30여척과 대전하여 적선을 침물하고 왜적 수백명을 사살하였고 6월 .. 더보기
임진왜란의 항왜 , 순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들을 항왜 반대로 일본에 귀순한 조선인들은 순왜라고 일컫는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종직시키고 대륙 정벌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력 뿐 아니라 그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당한 쪽의 군사들도 상당했다.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지만 이들은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히데요시를 상대하여 싸웠지만 그에 명령을 받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다. 항왜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야가(김충선) 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맡았으나 조선에 들어온 이후 박진에게 투항의사를 밝혀 귀순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또 울산성전투에서 김응서 휘하.. 더보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2년전 명량이라는 영화가 1700만명이라는 관객을 이끌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명량해전 이전 칠천량해전에 대해 이야기와 배설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로 있었던 배설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의 밑에서 칠천량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칠천량해전은 100척을 훨씬 넘는 판옥선 , 거북선 1만여명의 조선수군이 완전히 궤멸당한 전투이다. 실록에서는 조선수군이 활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하고 기록되어있다. 그 동안 승승장구 하던 조선수군은 하루아침에 모든 병력을 잃게 된것이다.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은 400여명의 아군을 버리고 소나무 아래 숨어있던 왜군들에 의해 사망한다. 조방장 김완은 일본의 포로가 되었고 끝 까지 싸우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와 최호는 끝.. 더보기
승리하지 못했다면 역적이 됬을 장군 임진왜란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침략이 있었다 오늘은 그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하고 의병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진주성을 함락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주성함락으로 그 밑에 조선 관군들과 의병들은 알아서 흐지부지 될거라는게 일본의 생각이었다. 당시 진주성은 김시민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김시민장군은 일본이 진주성을 노리고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는 김시민이 아니었다. 왜군들이 경상도를 휩쓸고 다니자 진주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상부에서 이경에게 산에서 하산하여 진주성을 지키라고 하였지만 이경은 병사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