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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y

영국과 인도의 역사 이야기

최근 tv프로 비정상회담 재방송을 우연히 보던 중 광복절특집 "피지배국vs지배국" 주제를 가지고

출연자들이 토론을 한걸 보았다.

JTBC 비정상회담 광복절특집 中

그러다가 영국과 인도 이야기를 듣던 중 한국과 일본이 떠올랐다.

일본은 중일전쟁에 들어서면서 "신성한 황군을 더럽힌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던 조선인을

1937년 12월 [조선인 특별지원병제]와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을 전장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전선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와 탄광으로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인도인들을 세계1차대전에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라고 요구한다.

영국은 전쟁에 참전한다면 인도의 자치권을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비용도 인도가 부담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인도군은 100만명이 징집됬으며 6만4천여명이 죽고 7만여병이 부상을 당했다.

인도의 반발이 심해지자 영국은 1935년 뒤늦게 인도의 자치권을 준다.

인도제국 국기

그러다 1939년 세계2차대전이 일어나는데 영국은 또 인도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이때 영국은 인도와는 아무런 상의없이 인도가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한다고 발표하였다.

인도 국민회의는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치권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며 거부한다.

영국은 뒤늦게라도 주었으니 이번에도 참전하라고 인도 국민회의와 옥신각신하고 있을 무렵

무슬림연맹이 국민회의와 입장을 달리한다.

무슬림연맹의 입장은 영국이 망하면 일본과 독일이 인도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영국은 이번에도 돕는다면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 한다고 발표했지만 국민회의는 여전히 반대한다.

국민회의는 자치권이 아니라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고려해본다고 하고 1차세계대전과 달리 전쟁비용도 영국이 부담하기로 한다.

그렇게 국민회의는 영국의 조건을 수락하고 일본의 침입에 맞서 버마전선으로 파병되고,

유럽전선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기도 하고 일본과 싸운 연합군 중 100만명 중 70%가 인도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군을 도와 영국과 싸운 인도인도 있었다.

1943년 싱가포르가 함락되면서 영국군으로부터 해방된 4만5천여명의 인도 병사들은 "반영감정"을 드러내며

오히려 일본과 손을 잡은것이다.

그 중심에는 인도의 독립을 무장  투쟁에서 찾으려했던 "찬드라 보세"가 있었다.

간디는 비폭력 찬드라 보세는 무장투쟁

그는 싱가포르에 인도 임시정부를 세우고 인도출신 포로들을 설득했다.

"우리의 적은 영국이지 일본이 아니라며"

인도국민군을 창설하여 일본군과 함께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전쟁은 패배하였고, 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으로 망명하려던 찬드라 보세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그만 사망한다.

영국과함께 전쟁에 참가했지만 영국군에게 총을 겨눈 찬드라 보세와 인도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

반역죄가 아니라 독립영웅의 일원으로 평가받게 된다.

우리나라도 일본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일본군을 탈영한 많은 한인들이 16만명이 있다.

그들은 광복군 또는 중국군에 편입되었거나

중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로 편재됐을 확률이 높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와 증언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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