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y 썸네일형 리스트형 영국과 인도의 역사 이야기 최근 tv프로 비정상회담 재방송을 우연히 보던 중 광복절특집 "피지배국vs지배국" 주제를 가지고 출연자들이 토론을 한걸 보았다. 그러다가 영국과 인도 이야기를 듣던 중 한국과 일본이 떠올랐다. 일본은 중일전쟁에 들어서면서 "신성한 황군을 더럽힌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던 조선인을 1937년 12월 [조선인 특별지원병제]와 1938년 2월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을 전장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전선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와 탄광으로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인도인들을 세계1차대전에 영국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라고 요구한다. 영국은 전쟁에 참전한다면 인도의 자치권을 준다고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비용도 인도가 부담.. 더보기 패전 후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에 광복을 맞았다.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미국에 원자폭탄 두방을 맞고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 할 수 없었고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의 식민지는 모두 해방되어야 하고 특히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 자유와 독립을 준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연합국의 정상들은 포츠담 회담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의 네 섬과 연합국이 인정하는 작은 섬에 한정된다.”고 못 박았다. 그렇다면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히로히토 덴노의 옥음방송으로 일본의 패전이 알려진 직후,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특이한 지시.. 더보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더비매치 경평축구대항전 경성(서울)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홈 원정을 오가며 개최하던 축구경기 조선일보 주최로 1929년 10월8일 첫경기가 개최되었다. 2002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번개 라는 캐릭터가 이런 말을 한다. "경성하고 평양 축구경기하는데 보러가지 않느냐고" 내 기억으론 축구경기를 보러가지 않았고 드라마에서도 축구경기에 관한 내용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번개의 대사 한마디에 일제강점기때도 조선에서 축구를 했었다는 이야기는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보며 2부 리그 3부리그의 팀들도 창단년도가 1900년대가 대부분이고 심지어 1800년대에 창단한 프로축구단이 많았다. 그 부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굉장히 부러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리그는 1983년 대한축.. 더보기 영화 타이타닉 인물들 에드워드 존 스미스타이타닉호의 선장침몰하기 전 어떻게든 침몰을 막아보려고해수의 배수를 시도하거나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전파사들에게 통신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끝내 막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다.최후를 맞이하기전까지 승객들의 대피를 도왔다고 한다. 윌리엄 맥마스터 머독타이타닉호의 1등항해사보트를 타는 것을 거부하고 배에 남아 끝까지 승객들을 구조하고 자신은 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얼어 죽고 만다.그가 졸업한 학교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가 세워졌고 고향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문제는 영화에서의 그는 우왕좌왕 하는 승객들을 제지하기 위해 총을 발사하다 잭과 파브리지오의 친구인 토미를 죽이게 되어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걸로 나온다.이것 때문에 영화사는 그의 유족들과 그가 졸업했던 학교.. 더보기 울릉도 왕국 우산국 중학생때 가족여행으로 서해 외연도로 여행을 갔었다. 처음으로 배를 타봤고 집에서 가장 멀리 떠난 여행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울릉도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울릉도 역시 신라시대의 또 다른 국가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신라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512년 (신라 지증왕 13년) 때부터 한반도 역사와 함께 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백제,신라가 한창 싸울때 우산국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왕국 이었다. 신라가 호시탐탐 우산국을 노리고 있었으나 험한 뱃길과 높은 절벽으로 둘러쌓여 정복이 쉽지 않은 섬이었다. 신라가 세력을 확장할때 우산국 정벌을 위하여 몇 차례 원정을 갔지만 실패했다는 예상이 된다. 고구려 영토 깊숙히 전진하려던 신라는 우산국이 신경 쓰게 된다. 신라 원정군이 몇 차례 .. 더보기 New Korea Plan 한국이 잘못됬으면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가 될수도 있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이 38선을 넘어 선전포고 없이 남한을 침략했다. 당시 시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38선 부근에서 자잘했던 총격전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으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장군도 조그만 국지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북한의 기습남침이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피난 1호 인물이었다. 입법부 사법부도 이승만이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시 정부에서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었으나 이승만은 대전까지 내려가 버렸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전쟁 사흘만에 서울을 빼았겼고 최후의 방어선을 낙동강으로 정하고 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이 고전하자 미국정부에서는.. 더보기 승리하고도 처형당한 장군 일본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여 조선군은 한강방어를 하던 중 그 마저도 무너져버렸다.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장군은 도성방어와 한강을 포기하고 임진강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왜군과 맞서기 위해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 이혼장군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게 되어 함께 도성안에 있는 왜군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양주를 중심에 두고 왜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해유령부근에 잠복하고 있었다. 잠복 하던 중 왜군 1개부대가 해유령을 넘어오자 미리 매복중이던 신각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적을 포위하여 왜군 1개부대를 몰살 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도망치던 선조에게 전달.. 더보기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그리고 태국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었지만 명나라의 참전으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번지게 되었다.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는 도중 여진족 누르하치가 임진왜란에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어버이의 나라 조선을 침략한 괘씸한 왜적을 응징하겠다" 라며 명나라를 통해 조선은 소식을 받았다. 하지만 조선입장에서는 반길 입장이 아니었다. 일단 여진족의 참전은 명나라와 거리를 둔다는 이야기가 될수도 있으며 조선은 누르하치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조선은 여진족을 오랑캐 취급하였고 여진족이 참전하여 왜군을 몰아낸다 한들 그대로 돌아갈지도 미지수였다. 오히려 명나라와 같은 대우를 요구할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여진족의 참전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윤두수는 "여진족이 참.. 더보기 김완의 일본 탈출기 김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1589년에 선전관에 벼슬에 오르고 2년 뒤 사도첨사가 되었고 선조 25년 임진(1592) 4월 13일 왜적이 부산항에 상륙하였음을 듣고 전라 좌수사 이 순신 장군진에 종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휴전에 접어들때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여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킨다. 자신은 도성을 버리고 명나라 코 앞 신의주까지 도망가고 이순신은 왜군들과 싸우고 바다를 지켰으니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는 것을 두려워한 선조는 이순신을 붙잡아들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당하면서 이순신 휘하에 장수들은 사직을 하거나 근무지를 옮긴다. 하지만 김완장군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때 함께 한다. 이순신과 함께 했을때는 옥포에서 적선 30여척과 대전하여 적선을 침물하고 왜적 수백명을 사살하였고 6월 .. 더보기 임진왜란의 항왜 , 순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들을 항왜 반대로 일본에 귀순한 조선인들은 순왜라고 일컫는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종직시키고 대륙 정벌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력 뿐 아니라 그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당한 쪽의 군사들도 상당했다.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지만 이들은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히데요시를 상대하여 싸웠지만 그에 명령을 받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다. 항왜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야가(김충선) 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맡았으나 조선에 들어온 이후 박진에게 투항의사를 밝혀 귀순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또 울산성전투에서 김응서 휘하..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