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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y

승리하고도 처형당한 장군

일본이 파죽지세로 북진을 하여 조선군은 한강방어를 하던 중 그 마저도 무너져버렸다.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장군은 도성방어와 한강을 포기하고 임진강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왜군과 맞서기 위해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 이혼장군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게 되어 함께 도성안에 있는 왜군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양주를 중심에 두고 왜군이 자주 출몰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해유령부근에 잠복하고 있었다.


잠복 하던 중 왜군 1개부대가 해유령을 넘어오자 미리 매복중이던 신각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적을 포위하여 왜군 1개부대를 몰살 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도망치던 선조에게 전달이 되지 못하였다.


먼저 도망친 김명원은 한강을 사수하지 못한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고 패배의원인을 신각장군에게 돌려버렸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신각이 도망쳤다고 조정에 보고를 해버린것이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의 진위를 밝히지도 않고 전쟁중에 군대 기강이 해이해지는것을 방지하고자 신각을 참하라는 명을 내리고 선전관을 보냈다.


그렇게 임진왜란의 첫 승전보를 올린 신각은 처형당하였다.


이 후 김명원의 보고가 허위로 드러나고 해유령전투에서 승리한 신각의 공이 알려지자 조정은 신각에게 내려진 참형을 거두고자 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 의 처 정씨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하였다.


신각이 이끈 해유령전투는 비록 적군의 숫자는 많지는 않았지만 개전 초기 계속 패배를 거듭하던 조선에게는 희소식이었으며 첫 승전보였다.


일개 군수도 아니고 부원수급 장수를 참하라는 명은 상당히 성급했었다.


적어도 진위여부를 가리고 시간을 갖고 조금 더 판단했더라면 조선은 유능한 장군을 스스로 잃어버리진 않았을 것이다.


또 신각은 왜란 이전에 조헌의 말을 듣고 황해도 일대의 방비를 어느 정도 해 놓은 덕택에 훗날 황해도 연안성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물리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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