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 1589년에 선전관에 벼슬에 오르고 2년 뒤 사도첨사가 되었고
선조 25년 임진(1592) 4월 13일 왜적이 부산항에 상륙하였음을 듣고 전라 좌수사 이 순신 장군진에 종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휴전에 접어들때 선조는 이순신을 질투하여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킨다.
자신은 도성을 버리고 명나라 코 앞 신의주까지 도망가고 이순신은 왜군들과 싸우고 바다를 지켰으니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는 것을 두려워한 선조는 이순신을 붙잡아들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당하면서 이순신 휘하에 장수들은 사직을 하거나 근무지를 옮긴다.
하지만 김완장군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때 함께 한다.
이순신과 함께 했을때는 옥포에서 적선 30여척과 대전하여 적선을 침물하고 왜적 수백명을 사살하였고
6월 2일에 당포에서 적선 20척을 격침 시키고 5일에 다시 당포에서 적선 5척을 격파하고
적장 1명과 병졸 30여명을 사살했으며 이에 이 순신 장군이 장군의 공적을 조정에 주달하여 정삼품(正三品)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위와 직책을 받았다.
전투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께 진언하여 거제도민으로 하여금 농사에 힘쓰게 하고 수금을 많이 생산케 하여 군량미 500석과 소금 다량을 확보하고
부서진 전선을 수리하는 데 앞장서니 그 공으로 선조 28년 을미년(1595)에 주사조방장에 승진 되었다.
하지만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칠천량해전으로 참전하니 조선수군은 점멸하였다.
김완은 부산의 적선을 공격하려다가 적의 함대에서 날아온 포에 맞아 왼쪽다리의 부상을 입었다.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구원군은 오지않고 오히려 멀리 노를 저어 도망갔다.
그렇게 김완은 왜군의 포로가 되어 안골포로 끌려 갔다.
포로가 된 김완은 "나라를 등지고 살기를 도둑질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원컨데 속히 죽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 라고 일본 장군에게 말한다.
이렇게 말하니 적이 성을 내어 목을 베려고 했다.
마침 함께 포로가된 조선군들이 옆에 있다가 애걸하므로 죽음을 면하고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일본에서 포로가 되어 1년이 지났을 무렵 조선포로 몇사람이 약간의 은자(銀子)를 몰래 주어 노자로하여 달아나라고 하기에
잡혀온 문대모(文大謨)와 함께 도망하여 작은 암자 절 간에 도착하였다.
늙은 비구승에 도움을 받아 저녁밥을 얻어먹고 은자까지 받았다.
도보로 여러 날을 지나 해안가에 도착하여 왜인의 어선을 탈취하여 밀항으로 고국에 돌아와 양산 군수에게 사실을
고하니 군수 박응창(朴應昌)이 그 사실을 감사(監司)를 통해 조정에 알리게되니
임금님께서 공로를 치하하고 해동소무란 어필을 하사하고 함안군수로
임명하여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포로가되었지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끝까지 싸운 김완장군은 6년간의 해전으로 심한 여독때문에 집무가 어려워 고향으로 돌아와 61세를
일기로 끝을 마치니 원종훈 1등(原從勳)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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