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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y

승리하지 못했다면 역적이 됬을 장군

임진왜란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침략이 있었다


오늘은 그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하고 의병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진주성을 함락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주성함락으로 그 밑에 조선 관군들과 의병들은 알아서 흐지부지 될거라는게 일본의 생각이었다.


당시 진주성은 김시민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김시민장군은 일본이 진주성을 노리고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각지에 구원병을 요청하며 진주성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는 김시민이 아니었다.


왜군들이 경상도를 휩쓸고 다니자 진주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상부에서 이경에게 산에서 하산하여 진주성을 지키라고 하였지만 이경은 병사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대로 도주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 김시민은 대리로 진주성을 지키고 있었고 사천에서 왜군을 일천의 병력으로 격파 하고 진해도와 고성을  탈환 하여 


조정에서 김시민을 목사로 승진시켰다.




김시민은 전라의병장 최경희 경상 의병장 곽재우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부하장수들과 광장에 군민들에게  싸울것을 호소한다.


여기서 !


왜군의 진주성침략을 대비하여 창원에서 미리 왜군의 힘을 빼놓겠다 하여 창원성을 사수하다 퇴각하는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성문 앞에 나타났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이니라 속히 성문을 열어라"


유숭인은 김시민과 힘을 합쳐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병력을 이끌고 온것이다.



하지만 김시민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당시 김시민은 진주라는 한 고을의 성주인 목사 계급이었고 유숭인은  경상우병사 경상우도에서의 대장급이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극상인 것이다.


김시민은 왜군이 성문을 열어준 틈을 타 쳐들어올까봐 성문을 열어줄수 없다고 이유를 댄것이다.


유숭인이 계급은 더 높지만 성주인 김시민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유숭인은 어쩔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를 지켜본 진주관민들은 웅성거림이 있었지만 지휘관들은 동요하지 말라며 호령하는 목소리에 그 웅성거림은 잦아졌다.


오후가 되자 멀리서 총성소리가 울리며 유숭인부대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김시민은 동요하지 않고 김시민은 꼼짝 않고 있었다.


성주가 동요하지 않으니 예하 부대장군들과 군사들도 가만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진주성전투를 결정적으로 사수하고 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고 경상 의병장 곽재우는 유숭인부대를 입성시키지 않는 것을 듣고는 


"이런 계책이 진주성을 온전히 지킬수 있는 방법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극상이다.


왜군의 본격적인 진주성공략은 6일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성문을 열어준 틈을 타 왜군이 들어올까봐 성문을 열어줄수 없다고 말한


김시민의 변명은 궁색한 데가 있다.


입성을 거부당하리라 생각하짐 못한 유숭인은 창원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방어전에서 승부를 걸기위해 진주성가지 몰려선 유숭인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진주성에 입성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나 잘못도 없었다


유숭인도 유숭인이지만 그 때문에 입성하지 못한 1천여명의 군사들은 어쩔것인가 


그와 함께 온 사천현감과 가배량권관 주대청도 500여명의 군사들도 유숭인과 함께 왔지만 입성하지 못했다.


당시 진주성의 병력은 3800여명 유숭인과 사천현감과 가배량권관 주대청의 부대를 합하여 1500여명의 군사들이 가세하여 5000명이 넘는 군사력이 여서


함께 진주성을 사수했으면 많은 도움이 됬을 것이다.


김시민이 유숭인부대를 입성거부한 이유는 아무래도 자신보다 열살이나 어린 유숭인이 직급을 앞세워 지휘권을 행사한다면 


여태까지 자신이 준비한 진주성방어가 성공하지 못할것을 염려하여 내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상황에선 지휘권은 성주가 갖고 있는 상황이어서 


사소한 마찰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유숭인은 자신의 계급보다 아래인 김시민성주의 지휘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김시민도 사람인지라 전공에 대한 생각도 염려했을 것이다.


유숭인과 더불어 수성전에 성공했을땐 과연 누구에게 더 많은 전공이 갔을지 말이다.


진주대첩에서는 대승을 거둠과 동시에 김시민은 전사하였으며 유숭인도 성 밖에서 분전하다 전사하였기에 시빗거리는 사라졌다.


if 김시민이 유숭인의 입성을 거부하고 진주성마저 함락당했다면 진주대첩도 없었고 역사는 김시민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


개전 초 함께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죽을고비 까지 넘겼던 두 사람의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