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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y

임진왜란의 항왜 , 순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일본인들을 항왜


반대로 일본에 귀순한 조선인들은 순왜라고 일컫는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종직시키고 대륙 정벌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력 뿐 아니라 그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당한 쪽의 군사들도 상당했다.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지만 이들은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불만이 있었다.


목숨을 걸고 히데요시를 상대하여 싸웠지만 그에 명령을 받고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이다.


항왜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야가(김충선) 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맡았으나 조선에 들어온 이후 박진에게 투항의사를 밝혀 귀순했다.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곽재우와 연합하기도 하였다.


또 울산성전투에서 김응서 휘하로 농성중이던 자신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선조에게 종2품 가선대부를 하사받았다.


다만 일본에 있을때 그의 지위나 본명 등 잘 알려지지 않아서 정확한 귀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의 문명과 도덕을 흠모하였음은 분명하다.


일본 이름 사야가도 그의 본명인지 별명 같은 호칭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 와 반대로 일본으로 귀순한 조선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도성으로 가는 길을 잡아주는 길잡이 , 일본군에게 조선의 상황 등 정보를 제공한 경우 , 일본군으로 소속되어 참전한 경우가 있다.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 내용에는 사천해전에서 일본군 소속으로 싸운 조선인이 있었다고 나와있다.


주로 조선정부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가졌거나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부역행위를 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조선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매국노 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요로 부득이 하게 일을 저질렀거나 생계형인 순왜였고 , 또 이들을 지키지 못한 조선정부도 책임도 지적되었기 때문에 조선정부에서도 


처벌은 거의 없거나 가벼운 편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순왜로는 국경인이 있다.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으며 1592년 7월 함경도가 함락되자 9월에 귀양온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있는것을 이용해 선동하였다.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며 스스로를 대장이라 칭하였다.


국경인은 객사를 포위해 조선의 왕자 임해군 , 순화군 , 그와 함께 온 신하들을 붙잡아 놓고 가토 기요마사를 맞이하였다.


가토는 국경인에게 판형사제북로에 임명 하고 회령을 통치 하게 했다.


국경인은 회령을 통치하면서 갖가지 횡포를 자행했다.


후에 가토는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국경인에게 회령수비를 위임했다.


그러나 정문부의 격문을 받은 유생 신세준 , 오윤적등에게 붙잡혀 참살 당하였다.


국경인은 일반 순왜와는 달리 일본 장군에게 벼슬까지 받아 횡포를 저질렀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자이다.


일본은 순왜는 인정하지만 항왜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양반에게 괴롭힘을 당한 조선백성을 해방 시켜준 해방군이라고 까지 표현하는데


일본은 역사왜곡 그만하고 죄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